한국전쟁 초기 중국과 소련이 북한을 지원ㆍ지시하며 전쟁 배후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중국측 자료가 공개됐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미국 우드로윌슨센터는 2008년 중국중앙문헌연구실이 출간한 <저우언라이문고(建國以來周恩來文稿)>를 입수해 일부를 발표했다. 1950년 4월부터 12월까지 9개월간 작성된 외교전문 31건이다. 주로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가 당시 김일성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관,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등과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당시 전황과 3국 입장을 살펴볼 기록으로 평가된다.

6ㆍ25 직전

저우언라이는 1950년 4~5월 3차례 소련 측에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서명한대로 항공기, 부품, 엔진, 낙하산, 교관 지원을 요구한다. 그는 작전 수행에 해ㆍ공군이 반드시 참가해야 하며, 준비태세는 소련 장비의 도착 시점에 달렸다고 압박했다. 이는 중국의 취약한 공군력, 지원을 미루려는 소련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6ㆍ25~인천상륙작전(9월15일)

북한 국경지역에 소련은 항공편대를, 중국은 동부지역 3개 방공연대를 배치했다. 김일성이 공군조종사 지원을 요청하자 중국은 불가 입장을 전하고, 대신 북한이 원하는 어떤 모델의 기관차든 50량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중국은 또 북한 지원을 위해 탄약고를 북부 만주로 이전하고, 북한 공장지대 보호를 위한 방공력 강화를 추진한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이 급반전 되기 직전 이미 북한은 중국의 지원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셈이다.

9월15일 이후

전황이 북한에 불리하게 전개되자 저우언라이는 구체적인 전술, 전투법까지 지시하기에 이른다. 그는 국군의 서울수복 8일 전인 9월20일 김일성에게 "무조건 38선 이북을 지키라"고 다급하게 지시한다. 이어 "적군(연합군)과 정면대치는 손실이 크니, 기동성을 발휘해 적군의 약점을 찾아내고, 연대나 대대 단위로 격리시켜 3~5배의 병력과 2배의 화력으로 궤멸시켜야 한다"고 주문했다. 저우언라이는 또 "화력과 장비가 우수한 미군을 공격하기 어렵다면 이승만 꼭두각시 부대(국군) 공격에 주력해 몇 개월마다 1, 2개 사단을 없애라"는 전투법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미제의 종들이 사라지면 미군은 고립되니, 그때 각개격파하라"고 했다. 또 연합군에 의해 퇴로가 막힌 인민군 1군단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남한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하라고 상세히 지시까지 한다. 저우언라이의 지시는 인천상륙 작전 이후 혼비백산해 있는 북한군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저우언라이는 전략과 관련, "적군(연합군)은 빠른 선택을 하며 전쟁이 길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우리 인민군은 장기전을 통해 승리를 얻어야 한다"며 "친구이자 동지로서 조언이니 숙고하고 답하라"고 김일성을 독려했다. 저우언라이는 또 다른 전보에서 "혼란에 빠지거나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희망이 있으면 승리한다"고 김일성을 위로하기도 했다.

마오쩌둥의 출병지시로 참전이 결정된 상태에서 저우언라이는 10월14일 스탈린에게 다급하게 폭격기 지원을 요청한다. 또 소련 공군 참전 시 중국군과의 지휘체계를 어떻게 할지에 지침을 달라고 한다. 그러나 소련이 공군 파병에 동의한 것은 보름 뒤인 10월29일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군은 두 차례 참전을 미루다 같은 달 19일 처음 압록강을 건넜다. 대외적으로 불개입주의를 선언했던 소련은 결국 11월15일 M-5 제트기 120대 이상의 지원을 약속했다. 스탈린은 중국 사령관들에 의한 단일 지휘체계를 승인했으나, 중국과 북한은 펑더화이(彭德懷)와 김일성의 합동지휘체제를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