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사람] 월가시위 아이콘으로 21세기 다시 혁명을 꿈꾸다
17세기 역모 실패한 포크스 '환생'

  • 강지원기자
길쭉하게 찢어진 입, 익살맞은 콧수염, 발그레한 볼. 뾰족한 모자를 눌러쓴 가이 포크스(Guy Fawkesㆍ1570~1606). 1605년 영국 국왕이었던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다 발각돼 처형된 반역자다. 영국 신교도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는 급진 가톨릭 세력과 결탁해 역모를 꾸몄다. 11월5일 의회가 개회하는 날 의사당 지하실에 폭약을 설치, 왕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밀고자의 폭로로 이듬해 처형된 비극적 인물이다.

17세기 실패한 반역자가 15일 전세계 82개국, 뉴욕과 시드니, 쾰른, 부쿠레슈티 등 1,500여개 도시에서 환생했다.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었던 그는 이번에는 "월가를 점령하라", "반 자본주의와 혁명이 필요하다"고 외쳤다.

그의 가면을 쓴 시위대들은 정부와 1%의 부유층의 탐욕을 규탄했다. 정부와 기업의 비밀문서를 폭로한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안 어산지도 그의 가면을 썼다. 21세기 혁명을 꿈꾸는 이들이 포크스를 상징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포크스가 반역자에서 혁명가로 거듭난 데는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힘이 컸다. 원작 만화를 바탕으로 2006년 개봉한 이 영화에서 포크스는 권력에 맞선 혁명가의 이미지를 덧입었다. 영화에 나오는 정의로운 인물은 영국 정부의 탄압에 맞서면서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나와 혁명을 선동한다.

포크스의 이미지를 현실의 거리로 끄집어낸 이들은 세계적인 해커그룹인 '어나니머스'다. 신분을 숨길 필요가 있었던 해커들은 2008년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나와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인터넷상의 표현의 자유와 정보공유를 주장했다. 이후부터 가면은 정부 권력에 맞서는 혁명가의 필수품으로 요긴하게 쓰이기 시작했다.

월가 시위대의 상징으로 급부상한 이 가면을 만든 이는 만화 '브이 포 벤데타'를 그린 데이비드 로이드(61). 그는 영국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만화에서처럼 가면이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는 의미를 지닌 브랜드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며 "대중 안에서 시위문화를 이끄는 아이콘이 돼 기쁘다"고 말했다. 한 시위 참가자는 "가면을 쓰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힘이 되는 것 같다"며 "단체로 가면을 쓰면 정부를 위협할 수 있는 위압감도 커진다"고 전했다.

월가 시위가 확산되면서 가면은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가면의 지적재산권은 '브이 포 벤데타' 영화를 제작한 워너 브라더스가 갖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개당 6달러인 이 가면이 올해 10만개 이상 팔렸으며, 수십 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