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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친화 공동체를 찾아서] <상> 호주 시드니의 '레츠'
A, B의 아이 봐주기 → B, C에 컴퓨터 교육 → C는 D에게…
릴레이 품앗이로 육아·노인수발 걱정 ‘뚝’
은퇴자·전업주부 등 유휴인력 활용…거래 땐 대안화폐 사용


시드니 레츠 운영자 케네디씨가 같은 마을의 목수 회원이 만들어준 다락방에서 옷을 수선하고 있다. 재봉 솜씨가 뛰어난 그는 “결혼을 앞둔 다른 레츠 회원을 위해 웨딩드레스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수업을 마친 시드니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부모와 함께 환하게 웃으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빈민구제운동 ‘레츠(Local Exchange Trading System)’가 일하는 여성들의 가족문제를 해결해주는 가족친화 공동체로 새롭게 주목 받고 있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호주 사회에서 가정이 도맡았던 육아와 노인수발 등을 지역공동체가 함께 떠안아 ‘일과 가정의 양립’을 지원해 주는 것이다. 전업주부와 정년퇴직자 등 유휴 인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레츠는 캐나다의 마이클 린턴이 1983년 창안한 지역 대안화폐 운동이다. 당초 실업자들이 자신의 노동력과 기술을 지역 주민들에게 제공하고 대안화폐를 받은 뒤, 필요한 물품이나 서비스를 구입하는 제도로 출발했다. 이후 거래 품목이 탁아와 노인수발 등으로 확대되면서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도와주는 수단으로 각광 받고 있다.

레츠는 릴레이 품앗이 방식으로 운영된다. 예컨대 전업주부 A씨가 맞벌이 주부 B씨의 아이를 돌봐 주고, 컴퓨터 회사에 다니는 B씨는 C씨에게 컴퓨터 디자인 기술을 가르쳐 준다.

또 요리 솜씨가 뛰어난 C씨는 파티를 준비 중인 D씨에게 음식을 만들어주는 식이다. 이들의 거래는 진짜 돈이 아니라 회원들끼리만 통용되는 대안화폐로 이뤄진다.

호주는 레츠 운동의 메카로 꼽힌다. 한때 세계 최대 규모의 블루마운틴 레츠가 운영됐던 지역이다. 요즘엔 시드니 레츠가 대표적이다. 시드니 레츠의 회원은 가정주부, 정년 퇴직자, 회사원 등 총 200여명. 이들은 대안화폐 ‘오페라’를 사용한다.

거래 단위는 일의 전문성과는 상관없이 시간 당 20오페라로 고정돼 있다. 거래 품목은 건축, 외국어 교습, 마사지 등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뿐 아니라 아이 돌보기, 음식 마련, 세탁, 노인수발 등 별다른 기술과 능력이 필요 없는 활동도 포함한다.

시드니 레츠 운영자 케네디씨는 “저출산ㆍ고령화 문제를 해결하려면 여성과 노인들이 생산활동에 종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며 “레츠에서는 시장경제에서 소외된 전업주부나 노인들도 모두 가치 있는 노동력”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전체 회원 중 20% 가량은 정년 퇴직자들이다. 이들은 탁아는 물론, 전자제품 수리, 글쓰기 지도 등 다양한 도움을 주고 있다. 구직자의 이력서나 각종 행정공문을 다듬어주고 있는 퍼거슨(67ㆍ여)씨는 “노인들이 젊은이들에 비해 체력은 조금 떨어지지만, 경험이나 능력면에선 결코 뒤지지 않는다”며 “지역사회를 위해 아직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전업주부가 레츠를 통해 새로운 기술을 익혀 취업에 성공하는 사례도 많다. 두 명의 자녀를 둔 멜라니(42ㆍ여)씨는 최근 2년 동안 레츠 회원 산드라씨에게 웹디자인을 배운 뒤 중소기업의 홈페이지 운영자로 취직했다.

멜라니씨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직장을 그만뒀던 여성이 나중에 재취업에 성공하기는 쉽지 않지만, 전문 기술을 갖춘 레츠 회원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얻었다”고 말했다.

시드니 레츠는 잔고 ‘0’를 지향한다. 주변 사람을 도와 오페라를 많이 저축하는 것을 결코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얘기다. 케네디씨는 “레츠는 지역 주민들끼리 서로 돕자는 의미이지 일방적인 봉사단체가 아니다”면서 “잔고가 마이너스라고 해도 신용불량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지역 주민을 도울 수 있는 가능성을 표시하는 지표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한국여성개발원 홍승아 박사는 “레츠는 지역공동체 운동인 만큼 지역사회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게 성공의 관건”이라며 “우리나라는 품앗이 등 상부상조의 전통이 있기 때문에 가족친화 공동체 형성에 레츠운동을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드니(호주)=글ㆍ안형영기자 prometheus@hk.co.kr
사진ㆍ홍인기기자 hongik@hk.co.kr  

입력시간 : 2006/11/26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