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군 60년] ④ 육·해·공군·해병대 名將
각군, 18명 선정… "군인정신 표상"
창군 이후 우리 군에서 군인정신의 표상이 돼온 명장(名將)은 누구일까.

육.해.공군본부와 해병대사령부는 28일 군대 창설 이후 살신성인의 자세로 조국을 수호하며 '군인정신의 표상'으로 추앙받는 명장을 추천했다.

육군과 해군은 각각 6명과 5명, 공군과 해병대가 각각 3명과 4명 등 모두 18명을 명장으로 꼽은 것.

육군에서는 고태문(1929~1952) 대위와 김백일(1917~1951) 중장, 김 성(1923~1993) 준장, 김용배(1921~1951) 준장, 이순호(1928~1952) 소령, 홍창원(1932~1952) 소위가 명장으로 뽑혔다.

해군은 해군참모총장을 각각 지낸 손원일(1908~1980).함명수(1928~) 제독을 비롯, 지덕칠(1940~1967) 중사와 이태영(1927~1951) 중령, 현시학(1924~1989) 소장을 명장으로 꼽았다.

공군 창설 주역인 최용덕(1898~1969).이근석(1917~1950).김영환(1921~1954) 장군도 명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공군 창설 주역 7인에 포함되어 있다.

해병대의 경우 김성은(1951~2007) 중장, 공정식(1925~) 중장, 정경진(1936~) 중령, 이인호(1931~1966) 소령이 후배들에게 명장으로 추앙받고 있다.

◇ 고태문 대위

강원도 양구의 펀치 볼(Punch Bowl) 고지 전투의 영웅으로, 1951년 8월 11사단 9연대 7중대 소대장으로 보임돼 펀치 볼의 884고지 전투에 참가했다. 당시 적의 완강한 저항 속에서도 소대원들을 독려하며 선봉에서 육탄돌격과 백병전을 감행해 고지를 탈환했다.

중위로 진급한 그는 5사단 27연대 9대장을 맡아 1952년 11월 펀치 볼 351고지 방어전투에 참가해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지만 끝내 진지 사수가 어려워지자 중대원들을 철수시키고 본인은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후 그의 부하들은 반격작전을 개시해 351고지를 재탈환했다.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됐다.

◇ 김백일 중장

1951년 3월 전방지휘소 작전회의에 참석한 뒤 귀대하다가 강풍으로 항공기가 추락하면서 34세의 나이로 산화한 6.25전쟁의 영웅이다.

1군단장 재직 시절인 1950년 10월1일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명령을 받고 예하 3사단을 진격시켜 국군 최초로 38선을 돌파했다. 정부는 이날을 국군의 날로 제정했다.

1950년 12월 흥남 철수작전 때 미 제10군단장인 알폰소 소장과 담판을 벌여 피난민 10만명의 안전한 철수를 이끌어냈다. 1계급 특진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됐다.

◇ 김 성 소령

6.25전쟁 당시 6사단 제16포병대대 지휘관으로, 당시 북한군 포병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빈약한 장비로 무장한 포병대대를 지휘했지만 철저한 사전 훈련을 통해 승리의 선봉장이 됐다.

북한군은 남침을 개시하면서 3,4사단은 의정부를 돌파해 서울로, 2,7사단은 춘천과 홍천을 통해 수원지역으로 진입한다는 일명 '3일 작전'을 준비했지만 국군 6사단에 의해 좌절됐다. 서부전선에서는 적의 의도대로 돌파가 이뤄졌지만 춘천과 홍천지역에서는 3일간이나 발이 묶였다.

북한의 기도를 저지하고 국군이 낙동강 교두보를 안정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전기를 만든 인물이 김 소령이 지휘했던 부대 때문이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3회)이 수여됐다.

◇ 김용배 준장

1950년 6사단 7연대 1대대장으로 춘천 북방 지내리 전선에서 T-34전차를 앞세우고 밀고 내려오던 북한군 제2사단을 맞아 단 한 대의 전차도 없이 온몸으로 지연작전을 수행했다.

뛰어난 지략으로 부대를 지휘해 횡성과 여주를 거쳐 무극리 방면으로 진출하던 북한군 제1사단 소속 정찰대를 매복으로 포위해 섬멸했다. 이후 북진작전에 참가, 압록강 초산에 가장 먼저 진출해 태극기를 꽂았다.

그러나 1951년 7월 5연대장으로 양구 군량리 지구에서 인해전술로 밀려오는 중공군 5군단을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1계급 특진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됐다.

◇ 이순호 소령

1952년 10월 7사단 3연대 9중대장으로 양구의 1090고지(일명 크리스마스고지) 전투에서 부상한 상태에서도 적에게 수류탄을 투척하는 등 사투를 벌였다.

'죽어도 이 고지에서 죽겠다'며 후송을 거부한 채 수류탄을 던지고 총검을 휘두르다가 적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1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됐다.

◇ 홍창원 소위

1952년 9월 수도사단 26연대 5중대 소대장으로 수도고지 전투를 지휘하다가 적이 진내에 진입하자 '진내사격'을 요청해 적을 격퇴하고 자신과 소대원 전원이 전사했다.

진내사격이란 아군이 주둔한 진지 위로 포화를 퍼붓는 것으로 우군의 안전대책이 강구된 상황에서만 이뤄진다. 하지만 홍 소위는 증원군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으로 판단하고 최후의 한 명까지 고지를 사수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진내사격을 요청했다.

홍 소위의 임전무퇴 정신은 수도사단 장병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됐다.

◇ 손원일 제독

항일 독립투사였던 손정도 목사의 장남으로 1930년 중국 난징 중앙대의 항해과를 졸업했다. 1945년 11월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을 창설한 데 이어 1946년 해안경비대 교장과 총사령관을 지내고 1947년 초대 참모총장으로 취임했다.

6.25전쟁 중에는 백두산함 함장으로 대한해협해전, 인천 상륙작전, 서울탈환작전 등을 승리로 이끌었다. 1953년 6월 국방장관에 임명돼 군대 정비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해군은 손 제독의 공훈을 기리어 첫 번째 214급(1천800t급) 잠수함을 '손원일함'으로 명명했다. 태극무공훈장과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 함명수 제독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주역으로 꼽히고 있다.

해사 1기인 그는 6.25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을 위한 첩보수집 'X-레이 작전' 임무를 완벽히 수행해 작전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1964년 제7대 참모총장으로 취임해 당시 고속 상륙구축함인 아산함과 웅포함, 해안방어용 레이더를 각각 도입하는 등 해군 전력증강에 기여했다.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됐다.

◇ 지덕칠 중사

베트남전의 영웅이다. 1966년 9월 청룡부대 위생하사관으로 참전했다. 고인은 1967년 2월 베트남 `추라이' 부근에서 미해군 UDT(수중폭파팀)의 수심 측량작업에 경계 지원을 하던 중 적 1개 대대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지 중사는 치열한 교전 끝에 소대원 3명이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자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빗발치는 총탄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자신도 왼쪽 어깨와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러나 지 중사는 8발의 총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상병들을 응급조치한 후 몰려오는 적들을 사살했다.

의무하사관이었던 그는 미군 헬기를 통해 부상한 동료 전우들을 먼저 후송시킨 후 마지막으로 헬기에 올랐지만 안타깝게도 후송 도중 27세의 나이로 결국 눈을 감았다. 1계급 특진과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됐다.

◇ 이태영 중령

1949년 첩보부대 파견대장으로, 납북된 미국 고문관의 전용보트를 되찾기 위한 몽금포 기습작전에 참가해 북한 경비정 1척을 나포했다. 6.25전쟁때는 704함장으로 서해 봉쇄작전과 동해 경비작전에 참가, 제해권 확보에 기여했다.

1951년 원산 영흥만 봉쇄작전에 참가, 북한군의 야포 공격 속에서도 적 후방 교란작전 차 주둔 중이던 해병 중대를 지원.보호하기 위해 접근하다 기뢰가 폭발하면서 승조원 57명과 전사했다. 1계급 특진과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됐다.

◇ 현시학 소장

해병대의 통영상륙작전을 지원, 낙동강 최후 방어선 수호에 기여했다. 해사 1기생인 고인은 원산만에 부설된 3천여개의 지뢰를 제거하는 작전에 투입됐고 황해도 피난민 구출작전 때는 6만여명의 피난민을 구출하는 공을 세웠다.

1950년 7월 첫 번째 참가했던 서해안 봉쇄작전 때는 신병 70명을 출동 중에 훈련시켜 남하 중인 12척의 적 수송선단을 격퇴하기도 했다. 금성을지.금성충무훈장이수여됐다.

◇ 최용덕 장군

해방 전까지 임시정부 군무부 항공건설위원회 주임과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과 참모처장, 총사령관 등을 지냈다.

1948년 초대 국방차관에 임명돼 국군조직법 제정에 참여, 공군 독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공군가, 공사교가 등을 작사했다. 1952년 공군총장에 보임된 이후 1956년 전역했다.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 이근석 장군

일본 소년비행학교 2기생으로, 전 일본 육.해군 대항 비행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조선인 최초로 비행교관 자격을 획득했다.

6.25전쟁 당시 공군비행단장을 맡아 항공기(L-4/T-6) 22대에 소형폭탄을 싣고 초저고도로 날면서 직접 손으로 적진에 폭탄을 투하하기도 했다. 1950년 7월2일 F-51D 전투기 10대를 인도한 다음 날 중부전선으로 날아가 적 탱크 2대와 병사 35명 등을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1950년 7월4일 대구기지에서 편대를 이끌고 안양 상공에 도달했을 때 적 전차부대를 발견하고 저고도로 강하해 공격하다가 피탄되자 그대로 적 탱크에 돌진해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공군 최초로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됐다.

◇ 김영환 장군

1954년 3월4일 사천기지 단장 시절 강릉비행단 창단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F-51를 직접 몰고 강릉으로 향하던 중 실종됐다.

고인은 형수인 이희재 여사(김정렬 초대총장 부인)가 만들어준 자주색 비단 천을 목에 걸고 조종간을 잡았으며, 모든 조종사들이 그를 따라해 공군의 성장인 '빨간 마후라'가 탄생했다.

◇ 김성은 중장

1950년 8월17일 통영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당시 외신기자들은 이 작전 성공을 전 세계에 타전하면서 '귀신잡는 한국해병'이라고 표현했다. 1953년 9월 해병학교장에 임명돼 정예해병 육성에 주력했고 1957년 6월 해병 소장으로 진급, 해병 1사단장을 맡았다.

1960년 6월 해병중장 진급과 동시에 제4대 해병대사령관에 보임돼 1962년 7월 예편 때까지 복무했다. 1963년 3월 국방장관에 발탁돼 한국군 최초로 구축함을 도입하고 합동참모본부를 설치했다. 1968년 1월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사건 등으로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금성을지,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 공정식 중장

해사 1기생으로 제6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냈다. 1952년 6월 도솔산전투에 참전, 미 해병대도 이루지 못한 도솔산 고지를 탈환해 대한민국 해병의 용맹성을 만방에 과시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이 전공을 기리어 '무적해병'이라는 친필 휘호를 하사했다. 해사 출신으로 최초의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그는 해병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살아있는 명장으로 불리고 있다. 금성충무훈장과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 이인호 소령

베트남전의 영웅으로 꼽힌다. 월맹군(베트공)이 은거한 동굴진지를 탐색하다가 전사했다.

1966년 8월11일 이 소령은 4명의 부하를 이끌고 동굴진지 5m 전방까지 접근했고 이때 월맹군이 던진 수류탄 한발이 부하들 앞으로 날아들었다. 이 대위는 이 수류탄을 집어던질 여유가 없자 곧바로 온몸으로 감싸 안고 장렬히 산화했다. 소령으로 1계급 추서됐으며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됐다. 미국 역시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

◇ 정경진 중령

베트남 짜빈동 전투의 주역으로, 1966년 베트남전 당시 대위로 청룡부대 11중대장으로 참전했다.

짜빈동 작전에서 월맹 정규군 2개 연대 병력의 야간 기습공격을 받고도 육박전, 기습공격 등으로 4시간 사투 끝에 243명을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는 베트남전 사상 중대 규모로는 최대의 전승 기록이었다. 이 전투는 해병대 6대 전첩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와 제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이 전공으로 군인의 최고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중대급 부대가 하룻밤의 전투로 태극무공훈장을 수상한 영웅을 2명이나 배출한 사례는 건군 이후 단 한 차례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