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에 네번 뿐인 '황홀한 만찬'… "손 꼽으며 기다리죠"
■ 70회 맞는 개방형 미식가 모임 '구어메 서클'
스타셰프 박효남씨가 총괄
"기획 한달 반, 실행 한달 반" 정성… 프랑스 정통요리로 17년째 '맛의 신화'
식사시간만 세시간 정찬서비스… 최고급 와인 6종 무제한 제공
1인당 22만원 고가불구 입소문… 가족·친구·연인끼리 참여 확산


계절이 바뀌는 첫 번째 주말 저녁이면 서울 중구 밀레니엄 서울힐튼 호텔의 로비에는 드레스와 정장 차림의 손님들이 속속 모여든다. 더블매그넘 사이즈의 샴페인을 들고 다니는 직원들 사이로 삼삼오오 모여 칵테일 리셉션을 갖고 있는 이들은 가족, 친구, 연인, 혹은 업무 파트너. 때로는 홀로인 이들도 있다.

제각각 모였을 뿐이지만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일년에 네 번뿐인 '황홀한 한끼 식사'를 위해 만사 제쳐놓고 방방곡곡에서 달려온 미식가들이라는 것. 이들은 힐튼의 프랑스 식당 시즌즈(Seasons)가 17년간 진행해온 개방형 미식가 모임 '구어메 서클(Gourmet Circle)'의 손님들이다.

1996년 5월 시작해 계절마다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진행돼온 구어메 서클이 올 봄 70회를 맞는다. 이 모임을 벤치마킹 해 특급호텔마다 비슷한 성격의 행사가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모객 실패로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을 보면, 국내 최장수 미식가 모임이라는 타이틀이 그저 흘려버릴 일은 아닌 듯하다. 15, 16일 저녁 두 차례 진행되는 이번 행사는 이미 한 달 전 예약이 끝나버렸다. 힐튼이 홀로 꿋꿋이 미식가 모임의 성공신화를 써나가는 비결이 궁금하다.

프랑스 정찬 디너 고수하는 고집과 열정

구어메 서클에 스타셰프가 없을 리 없다. 주인공은 밀레니엄서울힐튼의 총주방장이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프랑스 정부 농업공로훈장을 받은 한국 요리업계의 '거장' 박효남(52) 상무. 그가 이 행사의 기획자이자 연주자이자 지휘자다. 국빈 만찬을 지휘하는 수장의 손맛을 찾아 시즌즈를 찾는 손님들은 평소에도 많지만, 박 상무에게 구어메 서클을 찾는 손님들은 한결 각별하다.

"구어메 서클에 참여하는 미식가들에게 제일 먼저 계절 신메뉴를 선보이는 거니까, 가장 피드백이 확실하죠. 이분들의 입맛이 시즌즈의 메뉴를 결정하는 셈이라고 할까요. 이틀 행사를 위해 기획하는 데 한 달 반, 실행하는 데 한 달 반, 총 세 달을 바쳐 준비합니다. 한번 할 때마다 흰머리카락이 서너 개쯤 더 나올 정도로 고생스럽지만, 작품이 잘 나왔을 때의 쾌감 때문에 나태해질 틈 없이 달려왔네요."

구어메 서클은 식사 시간만 세 시간에 달하는 정통 프랑스 만찬이다. 리셉션을 마친 손님들이 자기 이름이 새겨진 테이블에 앉으면, 가장 먼저 화이트와인이 나오고 최대 4가지에 이르는 애피타이저가 서빙된다. 다음으로는 메인 요리를 위해 입안을 깨끗이 헹굴 수 있도록 셔벗이 제공되고, 주요리로는 흔히 먹는 쇠고기보다 양이나 비둘기, 오리처럼 프랑스인들이 즐겨 먹는 고기가 나온다.

프랑스 정찬 서비스의 핵심은 코스에 어울리는 와인 매칭이다. 흔히 마리아주(mariage)라고 하는 음식과 와인의 궁합을 맞추는 것이 포인트. 주요리뿐 아니라 이어지는 코스인 치즈와 후식에 이르기까지 최적의 궁합을 뽐내는 와인이 서비스된다. 마지막으로 커피와 코냑 같은 리큐어가 나오고 마무리된다.

"특급호텔의 프랑스 식당들 대부분이 퓨전으로 옮겨갔어요. 국내에서 정통 프랑스 퀴진을 고수하고 있는 곳으로는 시즌즈가 거의 유일할 겁니다. 정통 프랑스 퀴진은 효율성 면에서 보자면 현명한 선택이 아니지만, 이런 쿠킹 스타일을 좋아하는 분들이 여전히 많으니까 그만둘 수가 없죠. 프랑스 식당은 호텔의 얼굴이니까요."

프랑스 정통 요리법의 비효율성은 플람베(flambee) 같은 조리기법에서 잘 드러난다. 플람베는 브랜디를 끼얹은 음식에 불을 붙여 알코올의 휘발 성분으로 야채의 풋내나 고기 누린내, 생선 비린내 등을 날려버리는 조리기술이다. 보통 테이블에 음식을 올리기 직전 손님 앞에서 시연된다. 한번에 최대 80명이 자리하는 구어메 서클에서 일일이 플람베를 선보이는 것은 오로지 입맛 까다로운 고객들의 기대수준에 맞추기 위해서다.

"이런 식사 고맙습니다" 찬사

구어메 서클에 참여해 한 끼 식사를 하는 데는 세금과 봉사료를 포함해 한 사람당 22만원이 든다. 밥 한끼에 22만원은 어지간한 부자에게도 부담이 되는 금액이지만, 회계적으로 분석해보면 꼭 비싸다고만 말하기도 어렵다. 일단 호텔 판매가격이 30만원에 달하는 와인 여섯 종류가 무제한 제공된다. 구어메 서클이 유명해지면서 와인업체들이 스폰서로 나선 덕분이다. 여기에 단 두 차례의 저녁식사를 위해 식탁보를 비롯해 꽃, 조명, 양초 등 식당의 인테리어까지 완전히 바꾼다. 근속연수 20년 이상의 직원들은 손님의 이름과 직업, 동행자와의 관계까지 속속들이 숙지한 채 세심하고 세련된 서비스를 제공한다. 주방에서는 손님들 각각의 입맛에 맞게 간을 달리한다.

1회부터 69회까지 객장 서비스를 담당했던 안용현(53) 차장은 "손님의 3분의 2 정도가 늘 이 행사에 참여하는 단골손님일 정도로 구어메 서클의 만족도가 높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호텔로서는 과감히 손해를 보면서도 심혈을 기울여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모임을 찾는 이들은 주로 의사, 변호사, 전문 CEO, 유명 예술가 같은 오피니언 리더들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저녁 식사'를 위해 이곳을 찾는 보통사람도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다. 중장년층 가족, 친구모임이 대부분이지만, 프러포즈 하는 젊은 연인들, 홀로 오토바이를 타고 찾아온 고독한 미식가도 종종 눈에 띈다.

"평생 이 행사에 참여하겠다고 방 하나를 예약한 손님도 있고, 지방에서 올라와 숙박까지 하고 가시는 분들도 있어요. 천안에서 정기적으로 참여하시는 분들은 직원들에게 고맙다며 꼭 호두과자를 사오시고요." 근속 20년 이영미(44) 부지배인의 말이다. 1회부터 70회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모임에 참여한 변호사 모임의 남편들은 박효남 상무에게 직접 요리를 배워 호텔에서 아내들에게 직접 요리를 선보이기도 했다고. 부모와 함께 모임에 참석했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군인이 돼 구어메 서클 일정에 맞춰 휴가를 나온다.

"당신 요리가 최고라는 말은 흔히 듣죠. 하지만 구어메 서클에서는 손님들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어요. '이런 기회를 줘서 고맙다'는 말, 그게 제가 셰프로서 들은 최고의 찬사입니다." 박 상무가 특급호텔 종사자들끼리 돌아가며 여는 폐쇄형 미식가 모임인 체인디너보다 이 구어메 서클에 더 자부심과 애착을 갖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