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더듬다… 기찻길 따라 타박타박, 추억이 뭉게뭉게
■ 팔당~양수역 옛 중앙선 폐철로
납작한 청량리역 대합실엔 빳빳하게 전투복 주름을 세운 군인들과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은 여학생들의 비율이 늘 엇비슷했다. 가방 속엔 'SONY' 네 글자가 은빛으로 반짝이는 검은색 CD플레이어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한 줌의 저렴한 멜랑콜리도 있었다. 혼자 떠나는 기차여행. 출발시간이 가까워지면, 괜히 바위를 굴리러 가는 시시포스 같은 표정을 짓곤 했다… 이런 얘기가 이제 무척 진부하다. 닳고닳은 소비재로 전락해버린 1990년대 젊음의 감성. 하지만 너저분한 공산품 '추억' 더미 속에 나만의 진짜 기차여행 기억도 묻혀 있을 것이다. 오늘은, 그걸 찾아가 보기로 하자.

2000년대의 첫 10년이 저물어 갈 무렵 경춘선은 복선전철이 됐다. '조금은 지쳐 있었나봐 쫓기는 듯한 내 생활'로 시작하는 김현철의 노래는, 그때부터 내겐 수궁가 가락처럼 무형문화재가 돼버렸다. 출퇴근하는 비좁은 전철 안에 '내 취한 모습도 좋겠네'라는 청승이 차지할 자리는 없어 보였다. 뒤이어 중앙선도 출퇴근용 전철로 변신했다. 개통 소식을 전하는 신문기사 사진 속 플래카드의 '경축' 두 글자를 나는 '안녕'으로 읽었다.

철없는 감상을 차표처럼 쥔 20대에게 중앙선은 경춘선과 조금 다른 노선이었다. 대성리, 청평, 강촌 거쳐 춘천에 도착하는 기차는 대개 우르르 떠들썩했다. 하지만 양평, 원주 거쳐 멀리 태백, 제천, 해운대까지 가는 기차는 언제나 호젓했다. 열차에 올라 창가에 앉으면 들떴던 기분도 가라앉았다. 딱히 목적도 없이 편도로 끊은 티켓엔 간현이나 희방사, 석항 같은 낯선 지명이 찍혀있곤 했다. 덜커덩, 열차의 디젤 내연기관이 몸을 두드리는 리듬이 좋았다.

새 중앙선은 지금 원주까지 뚫려 있다. 서울에서 원주까지 1시간 35분 걸리던 소요 시간이 1시간으로 단축됐다. 그렇게 잘려나간 35분의 공간 속에 담겼던 기억들이 말하자면 오늘 여행의 목적지다.

청량리에서 출발한 중앙선은 도농역까지 도시 변두리 풍광 속을 달리다 덕소역에서 탁트인 한강의 모습을 곁에 두기 시작한다. 그리고 팔당역부터 콘크리트 세상의 경계를 벗어난다. 그래서 중앙선 기차여행의 출발점은 왠지 팔당역인 듯한 인상이 짙다. 그런데 2008년 12월 팔당역부터 국수역까지 복선전철이 놓이면서 팔당-능내-양수역을 잇는 강변 철로가 버려졌다. 팔당역에서 능내역까지 약 5㎞, 또 능내역부터 양수역까지 약 5.5㎞. 두물머리 물빛을 굽어보며 달리던 예쁜 철길이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던 폐철로는 옛 것 좋아하는 사람들로 두어 해 전부터 다시 붐비기 시작했다. 열차를 타고 빠르게 스쳐가던 풍경 속을 이제는 타박타박 걸으며 간다. 폐철로로 가는 입구는 예봉산 초입의 팔당2리. 진입로는 강변쪽에 있다. 걸어서 가면 폐철로까지 20분쯤 걸린다. 주차장 부근에 자전거 대여점이 몇 곳 있다. 한 시간 빌리는 데 3,000원쯤 받는다. 천천히 걸어 가도 능내역까지 한 시간 반, 능내역에서 양수리까지 두 시간이면 족할 듯했다. 걷기로 했다.

폐철로는 최근 깔끔하게 포장됐다. 어린이도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반반하게 닦고, 사람과 자전거가 다니는 길을 구분해 선을 그어놨다. 철길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군데군데 침목과 철로를 노출시켜 놓은 구간도 있다. 벤치도 단정히 만들어 적당한 곳에 놓고 전망데크에 다산 정약용의 시를 붙여 놓은 것도 제법 안목 있는 선택이다. 그런데 그 깔끔함이 마음에 들지만은 않았다. 기억 저편의 기차여행은 늘 세상 무언가와 어긋버긋했던 시간 속의 일탈이었던 것 같은데, 폐철로가 된 중앙선은 너무 반듯했다. 폐철로를 걷는 내내 그 버성김이 잡초처럼 발목에 감겼다.

팔당댐의 위치가 전방 3시 방향에서 4시 방향으로 각도를 트는 지점, 눈 앞에 터널이 나타났다. 봉안터널이다. 길이는 약 250m. 밝지 않게 은은한 조명을 설치해 뒀다. 늘 켜져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지나가면 거기 반응해 조명이 조절된다. 터널을 나와 얼마쯤 더 걸으면 카페 봉주르가 있다. 주말이면 입구 부근 옛 6번 국도에 체증을 일으킬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그 체증에 막혀 짜증을 부렸던 적이 몇 번 있는데, 강변을 걸어서 그곳에 닿는 기분이 묘했다.

"진짜 수십년 된 사진이 아니라 요새 찍은 거에요. 연세 지긋하신 분들만 관심을 가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젊은 사람들도 좋아하더라고요."

흉가처럼 방치되거나, 문화재로 지정만 해놓고 굳게 잠가 둔 다른 폐역과 달리 능내역엔 지금도 사람 소리가 왁자하다. 능내1리 마을기업인 물빛자전거세상이 지난해 9월 닫혀 있던 능내역에 고향사진관을 열고 여행객들을 맞고 있다. 사진작가 이명환(50)씨는 "주민들의 흑백사진 몇 장을 걸어뒀었는데 손님들이 관심을 보여서 원하시는 분은 찍어 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녹슨 무쇠주전자, 커다란 빨간 우체통이 있는 역사에 들어가면 자그마한 스튜디오가 있다. 5,000원을 내면 1970년대풍 교복을 입고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 추억을 담아갈 수 있다.

비둘기호가 다니던 시절의 열차 시각표가 아직 현역인 능내역을 나와 북쪽으로 뻗은 폐철로를 따라 다시 걸었다. 북한강 건너는 철교까지는 길이 차도와 겹치는 부분이 몇 군데 있다. 주말이라 차들은 길 위에 꼼짝 못하고 서 있고, 나는 천천히 걸어서 차들을 앞질렀다. 바람은 상쾌하고, 망막에 맺히는 풍광은 시원하고, 나무엔 꽃망울 맺히기 시작하고, 입장료 받는 사람도 없으니, 스치는 사람들의 표정엔 다들 만족이 가득해 보였다. 그 속에서 아슴아슴해지는 기억을 더듬는 건 쉬운 듯,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쨌거나 이제 기차여행은, 기차 없이 하는 게 진짜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수첩]

●중앙선 전철을 타고 팔당역이나 운길산역, 양수역에서 내려 내키는 대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 된다. 팔당역과 능내역에 자전거 대여점이 있다. 대여료 1시간 3,000원, 하루 1만5,000원 정도. 양수역 자전거 대여점은 3월 중 문을 열 예정이다. ●능내역 부근에 있는 다산유적지 입구에 실학박물관이 새로 문을 열었다. 조선 후기 시대사와 학문세계를 재미 있게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다. 운길산역에서 56번 버스를 타면 된다. 다산 유적 주변을 둘러보는 '마재마을 답사길' 안내도 받을 수 있다. (031)579-6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