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에 대한 오해와 진실
[한일 강제병합 100년]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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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대문독립공원에는 독립문과 독립관, 서재필 동상 등이 서 있어서 1896년부터 1898년까지 활동하였던 독립협회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다. 그런데 독립문에 대한 일반적 상식에는 많은 오해가 있다.

공원 내 안내문에도 문제가 많지만, 특히 서대문독립공원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1895년(고종 32년) 2월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 박사가 조직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우리나라가 중국, 일본, 러시아와 그밖의 서구 열강과 같은 자주독립국임을 국내외에 선포하기 위해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하고, 1896년 7월부터 최초로 전 국민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한 성금으로 공사를 시작하였다"는 내용은 틀린 부분이 많다.

첫째, 독립협회는 서재필이 조직한 단체라고 할 수 없다. 서재필이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독립협회를 조직한 것은 이완용을 비롯한 관료들이다. 특히 이완용은 당시 외부대신으로서 독립협회의 창립총회를 거행하였고 건립위원장을 맡았다. 이완용은 2대 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완용이 왜 나중에 친일파로 돌아섰는지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지, 있었던 역사마저 지워버리는 것은 아니다.

둘째, 독립협회가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한 것이 아니다. 영은문은 중국의 사신이 서울로 들어올 때 맞는 문으로서 속방외교의 상징이었는데 이미 청일전쟁으로 서울에 침입한 일본군이 헐어버려 독립문 건립 당시에는 아래 기둥만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독립협회는 영은문이 헐린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셋째, 독립문의 건립 목적은 조선이 모든 열강과 같은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하기 위해서라고 하기 어렵다. 독립문 건립이 발기되던 1896년 7월,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독립문의 건립은 어디까지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한다는 취지였다. 이는 일본의 논리에 말려들어간 것이기도 했다. 조선은 이미 독립국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청으로부터 독립시켜 주었다고 선전했지만, 실은 청을 몰아낸 후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다가 아관파천으로 좌절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독립협회가 말한 독립은 일제 하의 독립운동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러므로 현재 독립관에 일제 하 독립운동으로 순국하신 선열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

넷째, 독립신문에 관련된 서재필의 업적이 과대평가되고 있다. 독립신문 발행은 갑오개혁 시기에 정부가 추진한 사업으로 서재필에게 진행을 맡긴 것이었다. 아관파천으로 정부가 바뀌었지만 새 정부도 전적인 지원을 하여 모든 비용을 댔고 모든 관공서가 독립신문을 구독하도록 했다.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한 서재필은 당시 미국인 필립 제이슨, 한국명 '피제손'으로 활동하였다. 그럼에도 독립신문을 자신의 소유로 등록하였고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일본에 팔려고 했던 것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따라서 신문의 날을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 7일로 정하고 독립공원에 서재필 동상을 세운 언론계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국 최초의 한글 신문은 일본인들이 1895년 2월에 창간한 한성신보다. 그럼에도 한국 최초의 한글 신문이 독립신문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이 발행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엄격히 말해서 독립신문은 한국인 서재필이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 피제손이 발행한 신문이다. 따라서 신문의 날은 한성순보가 창간된 1883년 10월 1일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